0부터 다시 (AI에 관한 생각)
사람을 위해 쌓아온 계단이 필요 없어질 때
2024년 겨울 앤트로픽의 computer use 발표로부터 시작해 2025년 겨울 오픈클로(clawdbot)으로 꽃을 피운 AI 에이전트 방법론은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것만 같다. 사람이 행하고 있던 방식들이 정말 최선의 방식인가? 라는 질문.
우리(사람)들은 찾아보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컴퓨터를 켜고 브라우저를 열어서 필요한 정보들을 검색한 후 결과들을 하나씩 읽어본다. 그래서 에이전트 시스템도 일단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기로 했다. 웹에서 어떤 정보를 찾으라고 하면, 직접 브라우저를 열어서 관련 사이트를 찾은 다음, 그 사이트에 들어가서 회원가입/로그인을 하고, 요청된 정보를 찾아본다. 어떤 엑셀파일을 수정해달라고 하면, 관련있어보이는 폴더를 타고 타고 들어가서, 엑셀파일을 연 뒤 셀을 하나씩 눌러 함수를 수정한다. 사람이 하는 것처럼 매순간 컴퓨터 화면의 스크린샷을 찍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한다. 어디를 클릭할지, 어디에 뭘 입력할지. 등등.
근데 이런 동작은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다가온다. 우리에게 GUI가 필요했던 이유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도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뇌에서는 한번에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총량에 한계가 있고, 그 한계치는 데이터의 시각적 구성/구조에 많이 영향 받기 때문에 GUI라는 게 존재했다. 애초에 GUI라는 거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컴퓨터를 잘 쓰지 못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쓰기 쉽게끔 하기 위해서 탄생한 거였다. (원래 컴퓨터는 그냥 검은색 배경에 흰색 글자들이 잔뜩 떠있는 터미널이다 - 우리가 보는 예쁜 화면들은 전부 wrapper일뿐이고.) 하지만 AI는 다르다. 인간과 비교도 안될만큼 많은 텍스트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고, 또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뇌로는 상상하지 못할 복잡한 작업들을 쉽게 이행할 수 있다. 이런 AI에게 GUI는 방해물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UX/UI 따위가 필요하지 않다. 그저 데이터가 필요할 뿐이다.
일론머스크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늘어놓았다. Python도 Java도 심지어 C언어까지도, 우리가 아는 모든 프로그래밍 언어는 자신보다 더욱 원시적인 컴퓨터 언어의 구현체일 뿐이며, 이 구현체들은 인간이 바이너리 코드(0과 1로 구성된 원시 컴퓨터언어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사용하기 쉽게끔 추상화한 결과들인데, 사실 AI들에게는 이런 구현체들이 오히려 방해만 된다는 말이다. 굳이 추상화 레이어가 없어도 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은 AI가 "인간이 인간을 위해 만든 구현체 언어"로 코딩을 하지만, 머지 않아서 그냥 0과 1로 이루어진 바이너리 코드를 바로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 라는 말이었다.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AI는 이미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존재가 되었거나 적어도 그런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인류의 역사는 지금껏 계속해서 인류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계단을 하나씩 쌓아오며 연속적으로 발전해왔다. 0에서 1을 만들었고, 1을 만들었으니 2를 얹었고, 2까지 왔으니 3을 쌓았고... 이렇게 직전까지 만들어졌던 기반 위에 무언가를 새로 얹는 연속적인 발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가 아닌 컴퓨터가 중심이 되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인류가 중심이기 때문에 얹어졌던 1부터 N까지의 기반들은 모조리 필요가 없어졌다. 오직 컴퓨터를 위해서 0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파급력이 얼마나 파괴적일지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체제에 관해서까지 사고실험을 펼치게끔 강요한다. 잔혹한 체제 전쟁을 거치면서 ㅡ글로벌 옵티마까지는 아니어도ㅡ 적어도 로컬 옵티마 정도는 된다며 안일하게 생각해온 시스템들이 있다. 민주주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등등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이루는 시스템들. 근데 이거 잘 생각해보면, 모두 인간이 역사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구성되어온 시스템일 뿐이다. 컴퓨터가 역사의 중심에 서는 세상에서도 이 시스템들이 과연 최적의 시스템일까? 단순히 시장경제/계획경제 체제의 장단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바뀔지 모른다. 예컨대, 인간은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되는 세상이 올 거다. 그러면 인간은 뭘 하면서, 뭘 위해 살아가야 하지? 이런 본질적인 고민들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이런 건 더 이상 철학의 논제가 아니고 생존의 문제가 된다.
"AI 자동화 딸깍 릴스로 월 1000 벌기", "AI로 앱 만들어서 n억 벌기" 따위의 하찮고 저열하고 저렴한 토픽에 호도되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송두리째 바뀔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근데 테크 산업 바깥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무섭기도 하다. 이 지식의 간극은 빠르게 좁혀지겠지만, 시차가 문제라기보단 그 간극의 너비 자체가 두렵다.